인플레이션과 전쟁 펀드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재정 적자를 메꾸기 위해 화폐를 무차별 발행했고, 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야기시켰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길게 따져보면, 인플레이션은 또 다른 전쟁 – 2차 세계대전을 불러 일으켰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전쟁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기도 한다.
전쟁은 당연하게도 어마어마한 전비를 요구한다. 정부는 세금 인상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국민적 저항을 만만치 않기에 다른 방법은 더 선호하게 된다. 국채(채권, 일명 전쟁 펀드 War Bonds)의 발행이다. 전쟁 펀드는 예를 들어, 구매하면 10년 후에 원금과 함께 이자까지 붙여서 갚겠다고 정부가 보증하는 증서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당장에서 군비를 늘리기 위해, 즉 전투함을 건조하고 전투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고, 정부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해 돈을 무자비하게 찍어낸다. 그 돈을 조선소와 비행기 공장에 지불해 장비를 생산토록 한다. 회사는 돈을 받아 근로자에게 지불하고, 또 고용도 확대한다. 소득이 오른 근로자가 소비를 늘리면, 주변 상권이 호황을 맞이한다. 이런 식으로 돈이 돌고 돌아, 이전 포스팅에서 말한 통화 승수효과로 인해 10배 이상의 유동성이 발생한다. 전쟁을 위해 1조원의 돈을 찍어내면, 시장에서 10조 이상이 돌고, 10조를 찍어내면 시장에서 100조 이상의 돈이 유통된다. 당연히 돈 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인플레이션은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부는 전쟁 펀드를 판매해,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하는 것이다. 이 일을 무척 잘했던 대표적 케이스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 정부다.

미국의 전쟁 펀드 판매
미국 전쟁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특히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한 작품을 보면 미국 정부가 채권 판매에 열을 올렸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헐리우드의 스타들과 전투에 참여했던 전쟁 영웅들을 불러다, 채권 판매를 독려했다. 전쟁이 미국 시장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기 위해, “전쟁 펀드 구입이 애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어떻게든지 채권을 판매하려고 했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의 모든 근로자가 월급의 10% 이상을 채권 구입에 사용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1943년 6월 라디오 방송에서, 2700만명의 미국인이 매달 4억 2천만 달러 이상을 정기적으로 투자(채권 매입)하고 있다고 밣혔다. 2700만명이라는 숫자도 놀랍지만, 매달 매입하고 있었다는 것도 경이롭다. 그만큼 미국 정부가 채권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시장의 충격을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10~15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채권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갔다. 이 채권 판매는 모두가 행복했던 결말을 맞이했다. 미국 정부는 발권력을 이용해 전쟁 자금을 필요한 만큼 찍어냈고(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했고), 그 부작용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채권 판매로 억제했다. 또 채권 구매자들은 원금에 더해 이자까지 다 돌려 받았기 때문에, 금전적 수익을 얻었으며 인플레이션 회피라는 보이지 않는 이득도 얻었다.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해피 엔딩이었다.
진보정권과 국민성장펀드
전 국민에게 소비장려금, 쿠폰 등의 증정은 진보정권의 선거 승리 방정식 중에 하나라고 본다. 진보 정권은 소비촉진이라는 기치하에 돈을 살포한다. 당연히 그 부작용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혹자는 통화량(M2) 4000조원(2024)을 고려할 때, 13.9조원의 소비쿠폰이 얼마나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겠느냐며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햇듯이 통화 승수효과를 고려하면(한국의 통화승수 효과는 13~14배로 추정), 시중에 유통되는 돈은 180~194조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정책 하나로, 통화량이 4.5%~4.9% 증가해 버리는 것이다. 2026년 정부의 경제성장률 예측이 3.0~3.3% 수준인데, 4.5%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되어 버린다. 물론 이 계산은 너무 단순화한 예측이다.
왜 진보 정권에서 부동산이 오를까? 부동산이 인플레이션을 방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의 완전한 소유권은 인플레이션을 훌륭히 방어하는 건전한 장기투자로 오랫동안 간주되어 왔다. p87
<현명한 투자자> 벤저민 그레이엄
거기에 더해 국민들에게는 학습효과가 있다. 진보가 집권을 하면 돈이 뿌려지고, 부동산이 올라갔다는 과거 경험이 있다. 따라서 임차인들이 매매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공급부족까지 함께 하니 집값이 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패턴을 정권의 똑똑한 사람들이 모를까? 소비 촉진(쿠폰 살포) -> 부동산 가격 상승 -> 민심 이반 -> 정권 상실로 이어지는 상황을 몇 번 겪었을 것이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솔루션으로) 국민성장펀드가 나왔다고,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화폐 증가로 길 잃은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권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다. 다른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것이 주식 시장이다. 주식 시장으로 흘러가면, 주식 투자자 뿐만 아니라 기업이 수혜를 입을 수 있다. 그러니 여러 제도적 유인 장치를 마련했을 수 있다. 또 국민성장펀드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국민성장펀드에는 주가 부양이라는 목적 외에도 유동성 흡수라는 다른 목적도 있다고 나는 보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5년간 150조원을 조성한다고 했다. 1년에 30조원이다. 정부가 15조원, 민간이 15조원을 조성한다고 했는데, 내 눈에는 이 15조원에 소비쿠폰 13.9조원이 겹쳐 보인다. 소비쿠폰으로 13.9조원을 뿌리고, 다시 15조원을 흡수한다면, 통화승수 효과에 의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 이 돈을 R&D에 투자한다면 장기적으로 한국의 경제의 펀더멘탈에 개선될 것이고, 또 수익률이 좋게 나오면 일반 국민 투자자들도 혜택을 받으니 모두가 좋은 구조가 된다. 개인적으로 이 아이디어가 괜찮았다고 본다. 돈을 살포해도 부동산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투자 수익률로 참여자 모두가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투자 수익은 주식 시장이 호황이라면 다시 주식 시장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선순환을 만들기 전에 주식 시장이 금새 꺼져 버려 그 취지가 살아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